몇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토쿄에 갔다가 하루 여유가 생겨서 요코스카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라 군항 투어는 포기하고, 여기에 갔었지요.

 미카사 기념관입니다. 원래 박물관이나 군사 관련 기념물 같은 걸 좋아하는지라 전 세계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영국제 전함에 안 들를 수가 없었지요.

 

그리고 한시간에 한번씩 있는 무료 큐레이터 안내 코스를 따라갔는데...재미있게도 그 팀에 저 외에도 외국인이 한명 더-중국인 관광객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이 섞인 팀이 큐레이터 할아버지의 설명을 들으며 배 안을 도는 도중...어느 전시물 앞에서 제가 "아, 이건 전에 드라마에서 본 적이 있네요."라고 한마디를 했습니다. 그러니 큐레이터분이 "언덕 위의 구름인가요?"라고 묻더군요. 그렇다고 대답했더니...옆에 있던 중국인이 하는 말이, "그 드라마, 저도 봤습니다."

 

그 사람이 원래 전쟁사에 관심이 있어서 드라마도 보고, 미카사도 보러 온 건지, 아니면 드라마를 보고 관심이 생겨서 미카사를 보러 온 건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미카사 기념관 안에서 미카사가 나오는 드라마를 본 한중일 3국의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 진풍경이 펼쳐졌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지요. 아, 이게 문화의 힘이구나.

 

언론에도 자주 나오는 얘기지요. K-pop이나 한류 드라마 같은 거 관련해서도요.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에 관광객이 몰린다던가, 영상물이 히트치자 원작이 된 책이 잘 팔린다거나, 미남 배우가 나오는 사극을 보고 해당 시대 역사 공부를 하는 여생 팬이 생긴다던가 등등...단순히 얼마치를 팔았다, 얼마를 벌었다를 넘어선, 소재와 대상에 대한 관심을 만들어내는 그런 문화의 힘. 

 

제가 전부터 생각했던 것 중 하나가 '한국 전쟁이 잊혀진 전쟁을 벗어나는 방법 중 하나가 전세계적으로 잘 팔릴 만한 한국전쟁 영화가 나오는 게 아닐까?'였습니다. 얼마 전에 개봉했던 '포드v페라리'처럼 모르고 봐도 재미있고,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영화, 영화를 보고 나면 실제 역사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어지는 그런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

 

그런데 현실의 전망은 암울했지요. 요즘 헐리우드는 중국자본+중국 관객이 없으면 대작 만들기 어려우니 한국전쟁 영화를 만들기 힘들고, 전쟁 당사자인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전쟁영화는...십수년전에 만들어진 '태극기 휘날리며'가 그나마 해외에서 통할 퀄리티였고, 근래 만들어진 전쟁영화들은 대부분 수준 미달의 물건들이었지요. 역사에도 관심 없고 영화를 잘 만들 생각도 없는 사람들이 시류 편승과 잔재주로 돈이나 벌어보자는 안일한 생각으로 만든 게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즘 영화계의 반가운 소식을 보니 조금이나마 희망을 품게 되네요. 봉준호감독 같은 사람이 한국전쟁이나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제대로 된 영화를 만들어준다면, 그 영화가 이번처럼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어준다면.

그러면 우리나라도 덩케르크나 라이언일병 구하기 같은 마스터피스급 전쟁영화를 갖게 되지 않을지...

 

분명히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인데 80년대 배경으로는 1987이나 택시운전사 같은 걸작이 나오는데, 한국전쟁이나 일제시대 배경으로는 인천상륙작전이나 엄복동, 군함도 같은 것들이 튀어나오니...이 무슨 언밸런스인지...

(물론 밀정같이 잘 만든 영화도 있습니다만 그건 전적으로 픽션이라...)

 

이번 일로 전 세계에 통하는 A급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능력자들이 한국에 있다는 게 입증됐으니, 그 장인들이 부디 우리 역사 격동기의 모습을 스크린에 담아 이런 언밸런스가 해소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