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블리의 모순
 
먼저 글에서 소개해드린 마이크로 디테일인 그리블리 greeblie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합니다. 모형취미를 가진분들에 친숙한 갖가지 프라모델 부품들이 영화속 가상의 물체의 일부가 되어 사용되는 것은 여러가지 재미있는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에피소드6를 위해 만들어졌던 슈퍼 스타디스트로이어의 브릿지 부분 미니어쳐입니다. 1.5미터 폭으로, 브릿지의 설정상 크기가 들쭉날쭉하긴 합니다만 대략 1/170 정도 스케일에 해당되고, 부분모델이지만 단순한 형태에 복잡한 표면디테일이라는 스타워즈 디자인 언어가 여전히 유효합니다. 저 표면 그리블리는 당연히 각종 프라모델 부품들이겠죠? 해당 모델은 최종 전투에도 자주 등장했습니다만 특히 한솔로 팀이 훔친 임페리얼 셔틀들을 타고 엔도의 위성에 침투하는 부분에서 크게 등장합니다. 
 

특히 바로 위 장면은 상당히 클로즈업 되어 자세히 보면 연필로 그은 패널라인이나 도료의 입자도 관찰이 가능해서 재밌습니다. 옆 사진은 미니어쳐의 해당 부분입니다. 
 
표면을 살피다 발견한 은하제국 앞잡이 노릇을 한 미국의 대기업. 스타디스트로이어 건조에 협력한 포드사가 잘못했네. (포드부품 오른쪽엔 ERTL 밀레니엄 팰콘 프라모델의 부품입니다. 스타워즈 키트의 부품이 다시 스타워즈 미니어처에 킷배싱되는 친환경 순환 생태계)
 

32인치 밀레니엄 팰콘의 상판에도 같은 부품을 제공한것을 보면 포드는 그냥 돈주는대로 다 만드는 자본주의의 화신인걸로. 

팰콘은 표면정리를 한것처럼 보이지만 스타디스트로이어의 함교에 쓴 부품은 FORD 라는, 저 세계에는 존재할리 없는 문자가 새겨져 있죠. (설마 해리슨 포드는 아닐테고요)

 
 
저 부품은 타미야의 1/20 포드 타이렐 F-1 엔진 부분입니다. 이로인해 20세기 지구 레이싱카의 엔진부품이 다른 은하계 행성 코렐리아에서 만든 우주선에 붙어있다는 재미있는 모순이 발생합니다. (1/12 키트인줄 알았으나 네이버 스타워즈 까페의 제이제이b님이 1/20 키트라고 알려주셨는데 찾아보니 정말 그랬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블리 - 결과물인가 도구인가?
포드이건 페라리이건 무슨 현실의 물체라 하더라도 미니어쳐에 붙어있는 이상 엄연히 저 우주선의 일부입니다. 그 세계관에서 존재 불가능한 디테일이라 하더라도, 혹은 존재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 온갖 무리한 설정을 쥐어짜야하는 것이라도 말이죠. 
 
그럼 가상의 물체가 시각적으로 표현된 또 다른 예를 보죠. 조 존스턴의 스타 디스트로이어 디자인 스케치에서 펜으로 더해지는 선과 점들이 저 물체가 거대하다는 정보를 전달하고 있는데 미니어쳐의 그리블리들이 정확히 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즉 그리블리들은 해당 미니어쳐의 일부를 정확히 묘사하는 직설적 디테일이라기 보다 마치 펜으로 그려지는 디테일처럼 전체적인 인상을 더해주는 기호의 역할을 합니다. 외계 초광속 우주선에 거대한 8기통 가솔린 엔진이 붙어있을리는 없기 때문이죠. 그리블리는 분명 최종 결과물이지만 동시에 붓이나 펜처럼 모델러들의 도구이기도 한 중의성을 띄고 있습니다.  
 
그리블리가 직설적 디테일이 될수 없는 이유 - 위의 팰콘은 둘다 제국의 역습에 등장했습니다만 각부 디테일이 매우 다릅니다.(영화 스토리상 중간에 큰 개수작업이 이뤄질 시간도 없었습니다.) 둘이 일치하는 것은 오직 전체적인 '인상'뿐이죠, 각각 5피트 대형 미니어쳐와 32인치 소형 미니어쳐가 사용되었는데 스케일 차이와 상용킷들의 한계내에서 둘은 킷배싱에 사용된 부품들이 다를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밀레니엄 팰콘은 정확한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 우주선인 것이죠. (스턴트 배우와 연기 배우가 2인 1역하는 거라 봐야하려나요?)
 
그리블리의 장단점
그리블리 킷배싱은 미니어쳐가 만들어진 목적 - 영화속 가상의 물체를 묘사하는 목표를 매우 경제적으로 가능케했습니다. 모든 부분을 오리지널로 디자인해서 제작해야했다면 시간/예산상 불가능했을뿐더러 현실적 느낌도 훨씬 떨어졌을겁니다. 디자이너가 아무리 뛰어난들 현실에 존재하는 각종 모양을 그만큼 다양하게 생각해내기란 힘들테니까요. 
 
즉 킷배싱은 미학적으로 현실의 물체를 곳곳에 분산시키므로써 가상의 물체에 무의식적 현실성을 더해주는 효과도 있었던 것이죠.  

밀레니엄 팰콘 측면에 붙어있는 엔진부품 그리블리는 현실세계의 엔진을 무의식적으로 연상시키며 팰콘이 덕지덕지 이어붙은 고철덩어리임에도 강력한 동력원을 가진 빠른 우주선이라는 인상도 동시에 훌륭히 전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 단점과 한계점도 있습니다. 경제성과 현실감의 막대한 이득과 맛바꾼것은 온전한 오리지널리티와 완벽히 자기 완결적인가상의 물체라는 아이덴티티입니다. 위에서 보듯 우주선 함교에 포드엔진 부품이 붙어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할수는 없는 것이죠. 그저 못본척 해야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이상 가까이 가서 관찰하면 안되는 그런 존재가 되었습니다. 스타워즈가 만들어졌던 7,80년대는 본격 홈비디오 시장이 만들어지기 전이었고 사람들이 밀레니엄 팰콘이나 스타 디스트로이어를 볼수 있는 방법은 영화관에서 보는것 뿐이었습니다. 프레임 단위로 멈추고 자세히 관찰할수 있는 때가 아니었고, 빠르게 움직이는 우주선의 인상만으로도 충분했던 시대입니다. 
 
알겠는데, 그래서 어쩌라는거지?
다시 한번 사람들이 전혀 신경쓰지 않을 장황한 주제를 더 생각하게 된것은 최근 반다이의 정밀한 스타워즈 모형 프라모델 때문이었습니다. 반다이는 가진 기술력을 총 동원하여 아마도 스타워즈 부가상품 역사상 가장 정밀하고 뛰어난 일련의 프라모델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PG 밀레니엄 팰콘의 홍보물에 드러난 반다이의 자부심. 킷배싱에 사용된 부품 역추적은 물론 스케일 한계내에서 최대한 원본(?)대로 재현하려 노력한 매니악적 열정과 결합된 기술력은 스타워즈와 프라모델 팬으로서 매우 반갑고 고마운 일입니다. (아직 지르진 못했지만...) 
 
그리고 동시에 생각의 꼬리가 이어지게도 합니다. 반다이의 PG 팰콘의 원본은 무엇일까? 어차피 가상의 우주선이라 무의미한 질문이지만, 상징적 기호로 해석되어야할 그리블리를 저렇게 충실히 재현하는것을 보면 1/72 모형보다는 1.7미터짜리 미니어쳐 모형의 1/3.6 스케일 모델이라고 보는게 더 맞습니다. 그리고 PG 모형이 저렇게 꼼꼼히 미니어쳐를 재현할수록 또 다른 미니어쳐- 위의 제국의 역습에서 주역급으로 활약한 소형 미니어쳐-버전의 팰콘의 존재는 부정당하게되는 요상한 상황이 발생합니다. 가까이서 자세히 오래 보지 말아야할 미니어쳐를 이렇게 보면 볼수록 이 미니어쳐들이 만들어졌던 목적인 영화상의 우주선이 곤란해지는 것이죠. 
 
미니어쳐의 충실한 재현의 또하나의 예인 1/5000 스타 디스트로이어. 얼마나 충실했던지 개연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생겨버렸습니다. 매뉴얼에서도 저렇게 설명을 했지만 스타 디스트로이어(제국의 역습을 위해 만들어진 대형 미니어쳐)는 포트(좌현)사이드의 브릿지 디테일이 훨씬 뛰어나고 우현은 상대적으로 밋밋합니다. 
 
영화에서 좌현이 크게 부각되는 장면이 있었기에 그 필요에 맞는 디테일업이 이뤄졌고, 상대적으로 덜 노출되는 우현은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되는 경제적 제작이었죠. 만약 스타 디스트로이어 실물 우주선이 존재한다면 양 사이드가 비슷한 디자인 밀도를 가졌을겁니다만 반다이가 너무(?)충실하게 미니어쳐를 재현한 덕에 ILM 모델샵의 꼼수(?)가 이렇게 드러난거죠. 가까이서 자세히 보면 곤란한 상황의 반복입니다 ^^ (이 키트 가지신 분들은 한번 확인해보세요. 상대적으로 우현이 꽤나 횡합니다 ㅎㅎ) 
 
그래서 반다이가 취했을수 있는 또 하나의 방향도 상상해봅니다. 미니어쳐 그대로 정확히 재현하는 대신, 그리블리 디테일을 문자이 아닌 기호로서 해석하고 외연하여 미니어쳐가 묘사하려 했던 가상의 원본을 재현하는것 말이죠. 위의 포드 엔진 부품을 생각하면 그 부품을 그대로 재현하는 대신 그런 부품처럼 보일법한 스타워즈 세계내의 메카 디테일을 창작하는, 킷배싱을 통해 건너 뛰었던 부분을 마무리 하는 방식. RPF의 양덕 마스터들이 분노하고 그들을 리벳카운터로 돌변시킬만한 일입니다만, 스타워즈 미니어쳐들은 리벳을 카운트하면 곤란해지는 녀석들이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