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생인 저한테는 프라모델은 일종의 로망과 즐거움이었습니다.

 

초등 4학년말 즈음에 아마도 아카데미에서 나온 배터리 구동 프라모델 탱크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뭐, 도색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당연히 없었고, 그저 전선 달린 리모콘으로 움직이는게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6학년 올라갈때 쯤, 친구가 하던 전자키트에 빠졌죠. "라디오와 모형"을 친구들과 돌려보며, 제목은 정확히 기억 안나지만, 아마도 일본책을 번안한, 전자키트 게임기 제작 책을 하나 사서, 세운상가 2층을 주말마다 갔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거기 가면 다른 재미도 있었죠...)

감광기판을 만들고, 무려 500원이나 하는 IC를 신주단지 모시듯 소중히하고, 자잘한 부품들을 모아서 어렵게 어렵게 게임기를 만들었습니다. 사실 게임기라고 해봤자, Led가 깜빡이는 두더지 게임 수준이었지만, 나름대로 탁구, 테니스, 축구도 되었고, 심지어 두대를 붙여서 인베이더 형태도 된다고 했지만... 성공한 적은 없던것 같습니다. 2석인지 3석인지 하는 AM라디오는 성공했었고...

교복 자율화 1세대라서 그 옛날 검정 교복을 처음으로 입지 않았던 1983년 중1때 종이로 만드는 군함과 탱크를 알게되어 여러개 만들었던 기억이 나고, 도색을 해보자는 생각으로 포스터 물감으로 덕지덕지 발라본 기억도 납니다. 그러다가 어딘가 쳐박아둔 그 프라모델 탱크를 에나멜 몇개사서 도색을 해본 기억이 납니다.

당연히 부모님은 프라모델은 애들 장난감 수준으로 치부했고, 오히려 통기타와 다른 취미가 생기면서 오랫동안 잊혀지게 되었습니다.

 

어찌저찌 먹고 살기위해 해외 생활한지 벌써 20여년, 언젠가 부터 아들 녀석이 한국에 있는 삼촌들한테 건담을 선물받았고, 나도 출장을 가면 하나둘 사다줬죠. 몇해전 반다이 X윙을 하나 샀고, 아들 녀석이 별 관심이 없자, 내가 건드리게 되고 다시 프라모델 라이프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늘 전투기에 대한 로망이 있던, 나름 밀덕이라, 동네 하비샵에서 오래된 아카데미 YF-16과 당시엔 잘 몰랐던 바예호 물감을 적당히 사서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장치도 복잡하고 비싼 바람붓은 과감히 포기하고, 붓도색을 계속하다 보니 나름대로 요령도 생기고,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별 문제 없이 즐길수 있더군요. 가격도 저렴하게 72 스케일로만 진행하면서 (물론 모델 자체보다도 비싼 포토에칭이나 레진 파트를 사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완성되는 모습을 보니 나름 대견하더군요. 

취미로 하는 프라모델이라, 시간이 날때마다 조금씩 진행하다보니 완성에 짧게는 한달 길게는 반년이 걸리기도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성공적인 프라모델을 위한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시간"입니다.

나이가 먹어가며 오랫동안 작은 부품을 쳐다보는게 힘들기도 하지만, 모델을 만들기전에 어떤 형태로 갈지 고민하는 "시간"
과, 접착제, 프라이머, 아크릴, 바니쉬, 데칼, 유화 등등 모든 작업에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작업해야만 튼튼하고 후회가 적은 모델을 만들수 있었습니다. 

일반 세멘트 접착제나 순간접착제 또는 목공풀도 하루 이상 건조 숙성해야 단단히 붙고, 헤어 드라이어로 바로 말리기는 하지만, 프라이머나 아크릴은 일주일 이상 자연건조해야 안쪽까지 완전히 말라서 피막이 튼튼해 집니다. 데칼도 하나가 충분히 불려져야 접착되고, 접착후 충분히 건조한 후에야 다음 녀석을 붙일수 있습니다. 안그러다간 손날이나 손가락에 붙어있는 찢어진 데칼을 보며 좌절하게 됩니다. 바니쉬는 한 1-2주는 되야 끈적임이 사라지고, 유화는 얇게 발라도 2주 이상 건조해야 손에 묻지 않습니다.

그 기다리는 시간동안 중간 단계의 모델도 충분히 즐길수 있습니다. 사진도 찍고, 다른 부분도 만들고, 급할건 없죠.

 

微吟緩步(미음완보)는 조선초 정극인의 상춘곡에 나오는 구절로 “미음완보(微吟緩步) 하여 시냇가에 혼자 앉아, 명사(明沙) 깨끗한 물에 잔을 씻어 부어 들고, 청류(淸流)를 굽어보니 떠오느니 도화(桃花)로다”라는 싯구로, "조용히 조리며 천천히 걷다"라는 뜻입니다. 

모든것이 빠르게 변하고, 심지어 접착제도 가속 건조 시키는 방법이 있는 요즘, 프라모델이야말로 조용히 나혼자 천천히 "시간"을 즐길수 있는 좋은 취미라고 생각됩니다. 

 

사진은 5개월째 작업중인 에어픽스의 Westland Sea King (1/72)입니다. 안테나선 접착후 완전 건조를 위해 꼬박 24시간을 놔둔 상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