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용 키트"는 참 이상한 소리입니다. 꽃도 아니고, 풍경도 아니고, 하다못해 혼이 담긴 예술작품도 아니고, 공장에서 찍어낸 플라스틱 사출물을 박스에 담아서 그걸 바라보며 뿌듯해 한다니요... 변태스럽지 않나요? (연극 <사운드 인사이드>에는 사냥한 동물의 박제를 가지고 자위를 하는 삼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ㅋ)
저는 키트를 장만할 때는 언제나 나 자신에게 '너 이거 정말로 만들 수 있냐?'고 몇 번이나 묻고 다짐하고 나서야 삽니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이죠. 뜯고 싶지 않은 키트들이 약간 있습니다. 그렇다고 "관상용"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고, 그보다는 '그 때 그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싶다'는 심리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대학 시절 사귀었던 여자친구의 사진을 외장하드에는 소중히 간직하고 있지만, 정작 그녀를 이제와서 다시 만나라고 하면 손사래를 치는 것과 비슷한 심리죠. 그녀와의 고운 기억은 그저 기억으로만 박제하고 싶다는 마음이랄까요. (또 나왔다, 박제...)
에반게리온 HG는 제가 에반게리온을 막 보던 시기와 맞물려서 샀던 물건들입니다. (남들보다 조금 뒤늦게 봤습니다.) 시절인연이라는게 참 중요합니다. 같은 물건, 같은 사건이라도, '언제'냐 따라 그 가치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래서 이 키트들은 그 때의 기억까지 박스 안에 그대로 담아 보관중입니다. 누군가가 에바 5호기 HG는 되게 귀하다고 하더군요. 되팔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만, 그런 소리가 듣기는 좋죠.
저는 에반게리온은 TV판, 데스앤리버스, 그리고 엔드오브에바, 딱 여기까지만 봤습니다. 그 이후에 쏟아져 나온 극장판은 하나도 안 봤습니다. 그래서 '마리'라는 신규 캐릭터가 존재한다는건 아는데 여전히 데멘데멘 합니다. 설정을 찾아보니 키가 굉장히 장신인 소녀더군요. 겐도 사령관만큼 크던데요? 아마 근래에 일본에서는 키가 큰 여자가 인기인 걸까요?
저는 에반게리온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이, 기독교와 성경이라는 것이 일본인들에게 참 미스테리한 이미지로 다가오는구나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편의점보다 교회가 더 흔한 나라인 우리나라의 사람들에게는 기독교를 저리도 낯설게 바라보는 그들의 시각이 신선하게 보일 수밖에 없죠.
저는 '스카이크롤러'라는 애니를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디자인을 보는 순간 확 끌리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반다이가 1/72 프롭기를 만들면 어떤 느낌일까?'라는 궁금함이 컸습니다. 이거야말로 합리성은 밥말아먹은 충동구매의 전형이죠.
스토리를 모르니 제작에 뛰어들 추동력이 생길 턱이 없습니다. 박스 크기도 별로 크지 않으니, 충동구매를 했던 그 순간의 만족감을 그대로 박제시켜 간직하는 중입니다. 제 경험으로는 반다이 데칼은 세월에 대한 내구성이 좋지가 않아서 조금 걱정이 됩니다. 이러다가도 언제 마음 바뀌어서 뜯어 만들지 모르잖아요.
계속 반다이네요. 코어 파이터야말로 뜯지 않고 패키지 상태로 보관해야겠다고 진지하게 마음먹은 물건입니다. 박스 그림, 내용물 구성, 설명서까지 모두 패키지 상태로 있을 때 가장 온전하게 '작품'으로 남는 것 같습니다. 제가 뜯어서 만드는 순간, 갑자기 '작품'에서 '장난감'으로 확 강등될 것 같은 두려움이...
TV판의 그 조악했던 작화 속의 아무로 레이와 세이라 마스가 이렇게 근사한 추억으로 박제됩니다. 참 희한하게도 우리 부모님들이 젊어서 찍은 흑백 사진들은 다들 매끈하고 인물들이 좋습니다. 뽀샵질을 잔뜩 동원한 요즘 사진보다도 옛날의 그 흑백 사진 속 인물들이 더 잘 나왔던 것은 왜일까요?
그런 옛날 흑백 사진처럼 실물의 가물가물한 기억을 예쁘게 박제시켜 주는 박스 그림과 설명서입니다.
아오시마의 "에도풍정"도 이 상태 그대로 간직하는 중입니다. 명색이 '역사물'인데, 인형 색칠 할 줄 모르는 제가 괜히 건드렸다가는 어디 지방 소도시의 텅 빈 시설에 덩그러니 놓은 조잡한 기념물처럼 될 것 같아서요. 그리고 이것도 패키지가 잘 되어 있어서, 지금 상태 그대로가 '당시 일본의 역사적 모습'을 잘 조형화하여 보여주는 듯합니다.
'마자'는 아마도 마부를 뜻하는 것이겠죠? 문신충이군요.
2024년 한국의 모습을 소재로 하는 '서울 풍경'이라는 키트가 먼 미래에 나온다면 그것도 도색 설명서에 젊은이들 인형의 팔다리에 문신을 그려넣게 되어 있을 듯합니다. 요즘 애들은 문신을 정말 많이 하더군요. 하지만 문신을 가지고 뭐라하는 것도 20년 쯤 지나면 또 웃기는 옛날 추억으로 남겠죠. 마치 20년 전에 우리가 '배꼽티'를 입거나 머리를 샛노랗게 염색한 애들을 보고 혀를 끌끌 찼던 것처럼요. ㅋ
설명서에는 에도가 어떻게 확장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듯한 지도도 실려 있습니다. 지도 하니까, 우리나라와 그 주변 국가들을 표기한 지도를 한번 거꾸로 뒤집어서 보라는 이야기가 기억나네요. 지도에는 위 아래가 있지만 지리에는 위 아래가 없죠. 뒤집어서 보면 한반도의 위치가 정말 도드라져 보입니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참으로 중요한 위치라는 것이 눈에 확 들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