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소식은 미리 알았으나, 일에 쫓기다 보니 극장에서 내려가기 직전에야 겨우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부산 출신이고 아마도 92, 93년 즈음 보수동 일본서적상에서 불법복제 테이프를 1만원~1.3만원 가량 주고 샀었지요.
자막이 없어서 그냥 그림만 보는 수준.. (유일하게 읽은 자막은 'This is only the beginning'..ㅋ)
근 33년만에 내용을 알면서 보니, 마치 고대의 문자가 해독된 느낌이었달까요.
지금도 F91을 떠올리면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초반 콜로니 시내 공방전에서 아군 모빌슈트의 실탄 병기에서 날아온
탄피(155미리 포탄 수준..)에 피난 가던 애기 엄마가 맞고 즉사하는 대목이었습니다.
오래 전 보았을 땐 좀 과한 묘사가 아닌가 했으나, 흐름을 알고 보니 토미노 감독의 반전 사상.. 이라기 보다
전쟁에 대한 혐오가 느껴지더군요. 여타 우주세기 건담들도 비슷한 주제의식을 갖고 있는데,
주인공이 부모 세대를 꾸짖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른들의 어리석은 행동거지도 그려지고요.
감독의 부친이 일제해군 무기개발에 관여했다던가요. 왜 전쟁 같은 짓을 해서 우리에게 이런 세상을
물려주었는가 하는 원망이 들리는 듯 했습니다.
처음 이걸 보던 십대 말엔, 당연히 주인공의 감정선을 따라 가려 했겠으나
어느덧 오십 초입이 되고 보니 나는 어떤 '기성세대'인가 하는 자문도 들었습니다.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건 우리가 물려준 세상에서 요즘의 신세대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 싶기도 하고요.
작품이 공개된 게 1991년이면 퍼스트 건담과 10여 년 시차 밖에 나지 않지만, 메카닉 디자인이나
애니메이션 작화는 거의 오늘날 수준으로 완성되어 있는 것도, 생각해보면 신기합니다.
일전에 유튜브 건담 채널에 공개되었을 때, 집중을 못해 초반만 보다가 말았었는데 극장이라서 몰입이 잘 되더군요.
오랜만에 재미있게 봤습니다. 특히 극장 사운드로 듣는 'Etenal wind'는 정말 좋았구요.
평일 낮이라 10여 명의 중년 남성이 주요 관객이었는데, 아마 다들 사연이 있겠지요.
어쩐지 다 같이 커피라도 한 잔 하면서 감상을 나누면 좋겠다는 조금 실없는 생각이 들더군요.
개인적으론 이번 주가 '건담 위크'입니다.
목, 금에 '지쿠악스'와 '역습의 샤아'를 극장에 보러 갈 예정이거든요.
즐겨 보는 유튜브 채널에서 '역습의 샤아'는 어버이날 기념, 'F91'은 가정의 달 기념 개봉이라는 장난 섞인 해석을 들었는데
세월이 참 금방입니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