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1/48 Mig-21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어떤 분이 이 기종을 "쇠파이프에 삼각자 두 개 붙여놓은 모습"이라고 표현하신 적이 있는데 그 소리를 들은 이후로는 한동안 진짜 그렇게 보였습니다. ㅠㅠ 마치 KFC 로고를 "대두에 조그만 팔다리 달려 있는 모습"으로 묘사한 표현을 본 후로는 어쩔 수 없이 계속 그렇게 보이는 것처럼요. 이제는 그 게슈탈트에서 겨우 벗어났습니다.
아름다운 기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외모도 수수하고 옷차림도 화려하지 않은데도 어딘지 모를 품위 같은 것이 느껴지는 그런 중년 여인과 같은 멋을 지닌 기종이 제 눈에는 Mig-21입니다. Mig-21 말고도 대체로 러시아 전투기들에서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독특한 근엄함이 풍기는 것 같습니다. 단, Mig-27까지만요. Mig-29니 Su-27이니 하는 것들은 서방 전투기들의 생김새와 딱히 다른 것이 없더군요.
설명서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두 가지가 헷갈립니다. 첫째로, "알리캣..." 어쩌고 하는 부분이 중의적인 것 같습니다. 알리캣을 격추했다는 것인지, 알리캣에 격추당했다는 것인지... 둘째로, 걸프전이 아니라 이란-이라크 전쟁 아닌가요?
울프팩 1/48 P-35A 입니다.
원판인 하비크래프트 키트가 한 두 군데 조립에서 애를 먹이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아주 잘 맞고 훌륭한 제품이라고 생각합니다. 필리핀 주둔 기체라고 하네요. 저런 기체를 장비했던 미군이 몇 년 후에는 제트 전투기를 날리며 핵무기를 가지게 되었다죠. 역시 사람이든 나라든 기업이든, 일이 닥치면 다 해냅니다. 아니, 일이 닥쳐야 해냅니다.
다만, 사람과 조직은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한가할 때입니다. 사람은 한가하면 무언가 대단한 것을 창조해내지만, 조직은 한가하면 반드시 뻘짓을 벌입니다. 기업이든 나라든, 일단 안정권에 접어든 직후에 꼭 위기가 오는 이유가 바로 그것일 겁니다. 카카오처럼요.
사람은 놀게 해야 합니다. 근로시간을 최대한 줄여야 사회 전체가 발전합니다. 사람은 아무 할 일이 없어서 방구석에서 X알을 벅벅 긁으며 심심해 뒤지기 직전이 되면 역사를 바꿀 위대한 창조를 자연스럽게 해 냅니다. 열심히 초과근무를 해야 나라가 발전한다는 말은 키오스크 때문에 식당 알바 자리마저 줄이고 있는 나라에서 할 소리가 아닙니다.
제가 울프팩 제품을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에칭이 플라스틱 부품만큼 조립이 쉽습니다.
저같은 하수조차도 에칭이라는 하이테크 물건을 끄적거리며 마치 대단한 뭐라도 된 것처럼 혼자 우쭐거릴 수 있는 기회를 별로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제공해주는 참 고마운 메이커입니다.
트럼페터 1/72 "Soviet Voroshilovets Tractor" 입니다. 박스에 그렇게 써 있는데 뭐라고 읽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트랙과 바퀴 전체가 하나의 부품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린 시절 100원짜리 조립식에서 보던 부품 구성이죠. 그 이외의 부품들도 큼직큼직하게 한 덩어리로 되어 있습니다. 전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스케일모형 키트를 통틀어서 아마 이 녀석이 조립이 가장 간단할 겁니다.
눈 덮인 들판 위를 저 차량을 타고 달리면서 안에서 전투식량 까먹으면 진짜 별미일 것 같지 않습니까?
호로 부품은 벗길 수도 있습니다.
제가 20대 때 잠깐 근무했던 직장에서 사수에게 뭘 제대로 물어보지를 못했습니다. 제가 업무에 관해서 질문만 하면 불같이 화를 내더군요. 묻기 전에 생각은 해 봤냐? 더 생각해라. 그것과 관련된 기존의 결재서류들은 열람해 보기나 했냐? 관련 부서에 먼저 문의는 해 보고서 지금 나한테 묻는거냐?... 그러면서 같이 식사할 때 저한테 그러더군요. 자기 밑에서 5년만 '하드 트레이닝'을 받으면 회사가 절대로 자를 수 없는 에이스급 사원이 될 수 있다구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표 쓰고 나왔습니다. 제 인생에서 몇 안 되는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질문은 정말로 답을 원해서 던지는 것이 아니기도 합니다. 단지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목적"인 경우도 현실에는 많습니다. 그렇게 느껴진다면 질문에 답변을 안 하면 됩니다. 상대방의 말에 대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아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아도, 상대방은 별로 기분 상하지 않는다는 점은 온라인 공간의 장점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