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금형의 제품은 만들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 아카데미 1/72 세이버는 예외입니다. 유일하게 조립이 난해한 부분이 조종석 뒤통수 쪽의 캐노피 슬라이드라고 해야 하나? 그곳 딱 하나입니다.
독일어나 프랑스어에는 명사에 성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전투기 기종에도 성별이 있습니다. 세이버는 여성입니다.
기종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에어로 모형은 딱 이정도 크기가 보기 좋은 것 같습니다.
게시판을 보면 1/32 신금형 톰캣에 대한 바램이 가끔 보입니다. 저는 그런 큰 덩치를 놓아둘 집구석도 없어서, 나오더라도 구입해서 만들 엄두를 못낼 것 같은데 말이죠. 무엇보다도 에어로는 너무 크면 징그럽지 않나요? 이런 표현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는데, 저는 일종의 '불쾌한 골짜기'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개념적으로, '실물을 정확하게 재현한 모형'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 말 자체가 형용모순입니다. '모형'이라는 말은 모방해서 만든 덩어리 꼴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모방이란 비슷하지만 같지는 않은 겁니다. 만약 실물과 같다면 그런건 모방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지금 막 현대차 공장에서 출고된 그랜저와 바로 그 다음 라인에서 출고된 그랜저는 똑같습니다만, 뒤의 것을 앞의 것의 '모방'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 모형은 실물과 다르기 때문에 모형인 겁니다. 역설적이게도 "실물과 다르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모형의 정체성입니다.
그렇기에 톰캣 같은 가뜩이나 대형인 기종을 기어이 1/32로 만들어서 보면, 모형이라는 느낌이 없을 것 같습니다. 코앞에서 보면 실물과 같은 육중함이 느껴지겠죠. 개인적으로는 그런게 불쾌한 골짜기라는 겁니다.
잡설이 길었는데, 하여간 저는 1/72 세이버 정도의 크기가 딱 '모형스러워서' 마음에 듭니다.
타미야 1/48 무스탕입니다.
저는 미신은 믿지 않습니다만, 이 녀석은 '마'가 끼었습니다. 신기할 정도로 모든 과정이 꼬였습니다. 부품을 잘라내는 단계에서부터, 마지막 피토관을 순접으로 붙이는 순간까지도, 엥간해선 일어날 법하지 않은 우연이 매 단계마다 연발했습니다. 그것도 모조리 안 좋은 쪽으로 말입니다. 마치 프라모델이 "제발 나를 완성시키지 말아라!"라고 내 소매를 부여잡고 앙탈을 부리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습니다.
저도 성격이 만만치 않게 비뚤어진 인간이라, 그럴수록 더더욱 오기가 나서 기어이 완성시켰습니다. 완성도는 둘째치고, 진짜 힘들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심술쟁이와 진이 빠지도록 머리채 쥐어잡고 싸우다 온 것처럼 기진맥진합니다.
당분간 무스탕은 쳐다도 보기 싫을 것 같습니다.
하세가와의 계란비행기 바리에이션인 "에그 걸 컬렉션"의 인형들과 제로센을 마저 색칠하고 베이스에 얹어 완성했습니다. 세트들을 모아놓고 보니 모듬초밥 같기도 하군요. 어렸을 때는 초밥을 좋아했는데, 그때는 맛도 제대로 모르고 그저 초밥이라는 음식의 '이미지'를 먹었던 것 같습니다.
근데 억울한게... 이제는 식탐을 조절할 줄도 알고, 음식의 맛을 따져가며 가려먹을 줄 아는데, 대신 미각 자체가 둔해졌습니다. 지금은 무엇을 먹더라도 맛에서 강렬한 열광은 없습니다. 어렸을 때는 결혼식 부페 같은 곳에서 접시에 음식을 고작 두서너가지 놓고 깨작깨작 하던 어르신들이 진짜 이해가 안 갔는데, 요즘엔 제가 그러고 있습니다.
비행기는 질려서 (특히 무스탕에 데어서!) 또 탱크로 전환합니다.
타미야와 아카데미의 스튜어트를 같이 작업중입니다. 나온 연도로 보나 정밀도로 보나, 두 제품은 상대가 되지 않.... 아야 하는데, 조립해서 기본색칠 올려놓고 비교해 보면 타미야의 골동품도 그닥 꿀리지 않습니다.
중국 메이커들이 엄청난 신제품을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내는 요즘이지만, 말 그대로 "종이에 자 대고 그려가면서" 금형을 만들었던 1970년대의 타미야 제품들이 저는 훨씬 더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조선왕조 퍼즐, 재미있었습니다.
저처럼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조선이라고 하면 "군사력에 힘쓰지 않았던 나라"라는 선입견이 강합니다. 그런데 퍼즐을 맞추면서 생각이 좀 바뀌었습니다. 500년동안 이렇게 수많은 전란을 끊임없이 겪은 나라가 군사력이 평타 이하일 수가 없습니다. 진짜로 약했더라면 500년을 유지하기는 커녕 진작 망해서 없어졌겠죠. 퍼즐의 그림을 보면, 조선은 정말이지 평화로운 시기가 별로 없었더군요. 거의 항상 전쟁, 분쟁, 혹은 내전을 겪던 나라입니다. 어쩌면 "조선은 군사력이 약하다"라는 선입견은 조선이 워낙 말도 안되는 체급의 깡패 둘 사이에 끼어서 지내왔던 탓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