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극단적이지만 일반적인 가정집이라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시나리오로, 대부분의 도료는 빛=자외선에 취약합니다. 자외선은 도료를 열화시키고, 이에 따라 모형의 색은 변색되고 탈색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내광성 (Lightfast) 이 있는 페인트를 찾아 쓰기도 하지만, 회사 별로 테스트 기준이 부정확하거나 관련 지식이 부족하여 실질적으로 내광성을 상실했는데도 부적절하게 작업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어짜피 몇년 후에 벌어질 일인데 무슨 상관이냐고 물으실 수도 있지만, 사람마다 자신의 모형에 부여하는 가치는 다르기 마련이며, 목범선처럼 100년 이상 가는 모형이라면 수십년 후 자신이 만든 작품의 페인트가 다 떨어진 걸 보며 놀라워 할 수도 있습니다. 의외성을 즐길 수도 있겠지만, 만들 때부터 내광성이 튼튼한 도료를 고려하면 만든 직후부터 수십년 후까지 똑같은 모습이 유지되는, 자신이 의도한 작품을 만들 수 있죠. 내광성이 높다고 딱히 비싼 것도 아닙니다.
https://www.kimcrick.com/pages/fugitive-pigments-list-lightfast-test-problems-art-supplies
위 링크는 해외의 그림 물감 셀러로, 직접 수많은 물감을 플로리다의 뙤약볕에 1년간 쐬어서 탈색 정도를 직접 테스트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아래는 대충 어떤 내용인지 요약한 것이며, 링크에 들어가면 더 방대한 실험 자료를 보실 수 있습니다.
1. 내광성(Lightfast) 테스트 규격
내광성을 테스트하기 위해 정해진 양의 자외선을 조사하여 색이 바래지는 정도를 측정합니다. 직사광선을 쓰는 경우도 있지만 일정한 조건을 만들어내기 위해 현대에는 인공조명을 씁니다.

(1) BWS (Blue wool scale)
BWS 는 염료 산업을 위해 만들어진 내광성 규격으로, 3~15개월간 자외선을 조사하여 테스트합니다. 가장 빠르게 변색되는 BW1 LFV 등급의 경우 고작 몇시간~3일 내 탈색되어 버리며, 15개월이 지나도 변색되지 않으면 BW8 LFI "Lightfast" 등급을 받습니다. BW7-8 등급이 실내 조명에서 변색되려면 150년이 걸립니다.
하지만 저자가 BW8 등급을 받은 도료를 테스트한 결과 희석시 BW3-5 등급을 받은 도료와 동급으로 빠르게 탈색했습니다.
(2) ASTM (American Society for Testing and Materials)
1898년 설립된 미국의 가장 큰 민간 표준 설립 단체에서 만든 규격이며, 가장 모범적인 회사 중 하나인 Golden 에서 공개한 테스트 방법 (링크) 은 1/20 으로 희석하는 보다 현대적인 표준입니다. Golden 은 다중 노출 촬영과 여러 샘플로 3년간 분석하여 신뢰도 높은 결과물을 보여주지만, 불행이도 전세계의 많은 회사들은 원액 그대로의 두꺼운 물감과 미공개 자체 테스트 기준으로 내광성 테스트를 불명확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짧은 시간의 내광성 테스트는 큰 의미 없습니다. 자외선 차광 바인더가 무너지는 순간 탈색은 삽시간에 진행되며, 이는 가게의 쇼윈도에 올려둔 제품을 1년도 못가서 내려놔야 한다는 걸 뜻합니다. 최소한 3개월 테스트로 변색의 징후가 보이면 양호하며 1년 이상 버티면 내광성이 있는 도료입니다.
테스트의 정밀도 외 설계 또한 현대 예술가가 쓰기엔 다소 비합리적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변색에 민감한 계열의 색상에 맞춘 테스트이기 때문에, 변색에 둔한 파란색 계열의 색상은 미묘한 차이를 보여도 변별력이 떨어져서 예술가들이 충분한 정보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2. 내광성을 떨어뜨리는 요인들
자외선이 원인이니 당연히 UV 노출이 가장 큰 피해 원인입니다. 적도에 가깝고 자외선 입사가 많은 주방, 거실, 바닷가일수록 실내라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일출, 일몰 시 1시간이라도 햇빛이 들어오는 집이 100년간 어두컴컴한 박물관 조명보다 탈색이 심한 건 말할 것도 없습니다. 빛이 직사하지 않더라도 네온 형광 같은 염료는 수명이 몇 주밖에 안됩니다. 빛의 스펙트럼 특성상 빨간색 분홍색 계열이 탈색이 심하며, 흑색, 파란색, 초록색은 변색에 강합니다.
아크릴 계열이 바인더 특성상 내광성이 좋다고 알려져 있지만 수채물감이 꼭 약한 건 아닙니다. 아크릴도 희석하면 내광성이 삽시간에 떨어지며, 수채물감도 내광성을 올려주는 도료를 섞어주면 튼튼해집니다. 물에 타서 그렇죠.
Krylon UV 스프레이는 쓸모없습니다. 두꺼운 레진 코팅 또는 Golden UV 바니쉬로 최소 3~6층을 입혀야 변색을 방지할 수 있지만 어지간히 범벅이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자외선 차단 액자는 사기입니다. 자외선 차단 유리 액자에 뿌려진 UV 스프레이는 안 뿌려졌을 수도 있고 있어도 있으나마나입니다. 일반적인 사람에겐 감당할 수 없는 가격의 박물관급 자외선 차단 유리만이 효과적이며, 자동차나 실외용 집유리 (썬팅된)파란색 착색 유리 또한 효과적입니다.(그런데 그럼 보이나?) 결국, 나중에 프레임을 씌우는 것보다 처음부터 내광성 도료를 쓰는 것이 월등히 저렴하고 쉽습니다.
3. 실제 테스트 사례 (일부)

신한 수채화 물감 SWC (Olive green/Sap green)
신한 수채화 물감은 Nitroso Green PG8 색상에 대해 두가지 옵션이 있습니다. (색감에 대한 평은 패스) 둘 다 두텁게 발랐을 때 내광성은 LFII~LFIII 가량이고 희석할 수록 더 빠르게 내광성을 잃습니다. (주 : 공식 스펙상 내광성은 ★★/★★★ 으로 중간)

신한 한국화 수채화 물감 (양홍 Carmine 2/연지1 Crimson 1/연지2 Crimson 2)
1년 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공식 스펙은 ★★★/★★★)
https://justpaint.org/dont-fade-away-recent-testing-of-protective-coatings/
링크 타고 돌아다니다가 Golden 랩 (그러니까 홍보) 사이트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발견했습니다. 디지털 출력물 보호용 코팅제를 테스트한 건데, 제가 즐겨 쓰는 잉크젯 데칼 출력시 보호용 UV 코팅제와 직결되는 기사입니다.

테스트는 엡슨 P700 프린터로 이루어졌으며, 프린터로 출력한 인쇄물에 Golden 에서 나온 UV 코팅제를 발라서 자외선에 얼마나 보호되는지 확인했습니다. 그래프는 손실율이므로 높을수록 색이 날아간 겁니다. 코팅제를 안 바르고 1200 시간 노출시 92%의 마젠타가 날아간 겁니다.
프린터 출력물이 취약하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더 약하고, 자작 데칼에 UV 코팅을 한겹도 아닌 여러겹으로 꼼꼼히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 결과였네요. 그렇지만 두텁게 깔면 티가 많이 나는게 아닌지 고민됩니다.

시중의 어떤 제품은 전혀 효과가 없고 오히려 더 뚫린(??) 상태로 만든다는데 제품을 공개하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수백년 후에는 우리들도 흙과 먼지만 남겠지만 미켈란젤로의 흑백톤의 대리석 걸작도 원래는 채색이 되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