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 - 환경, 그 벗어나기 힘든 한계
게시판 > 알수 없음
2007-12-25 14:26:22, 읽음: 1337
dougl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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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초기이니 아들놈이 열살 남짓하던 무렵 일 것 이다. 평소 운동을 그다지 즐기지도 않는 놈이 매일 학교가 끝나면 몇 시간씩 공을 차고는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는 게 좀 이상하여 슬슬 얘기를 시켜보니 그 진상이 무척 재미 있었다. 같은 반에서 제일 힘센 흑인아이 에이드리언이 학교 끝나면 무조건 다 축구 하러 나오라고 했기 때문에 좋든 싫든 저한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단다.  

 

그래서 어느 한가한 여름날 오후에 이 놈들이 공을 차는 운동장엘 나가 보았는데, 과연 그 중에서 누가 에이드리언 인지 한눈에 알아 볼만했다. 덩치가 웬만한 고등학생보다 큰데다 기운이 항우장사 같은 놈으로, 필드는 이 녀석 혼자서 주장, 감독, 코치의 역할을 다 해먹는 독무대였고 아들놈을 포함한 다른 녀석들은 모두 이 녀석에게 매맞기 싫어 억지로 끌려 나온 기색이 역력했다.

 

한참을 지켜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아이가 특별히 축구를 잘 하거나 재능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축구강국 한국의 기준으로 본다면 아주 평범한 그 또래 아이들의 골목축구 수준…다른 게 있다면 그 황소 같은 체력 정도? 게임이 끝나고 땀을 씻고 있는 녀석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왜 그리 열심히 축구를 하니?

 

기다렸다는 듯 묻지 않은 말 까지 대답이 줄줄 쏟아진다. 자기는 정말 세상에서 축구가 제일 좋다, 장래 희망은 축구선수가 되어 유럽 프로 팀에 스카우트 되어가서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가 되는 것이다…… 등등.

 

“ 그래, 열심히 해 봐라’ 라고 말해주었지만 참 많은 생각이 머리 속을 오갔다. 그리고 이 순진하고 착한 녀석이 측은하게 느껴졌다.  

 

아시다시피 북미에서 축구에 대한 인기와 관심은 사실상 제로에 가깝고, 이 토론토 일원에서 축구 팀을 가지고 있는 학교가 단 한곳이라도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당연히 이 아이를 지도해줄 코치도 없고, 소속될 팀도 없고, 경력을 쌓을 대회도 없을뿐더러 더 근본적으로 이 아이가 소질이 있는 지, 없는지를 판단해줄 만한 안목을 가진 사람조차 없다.

 

열 두어 살이면 유럽이나 남미에서라면 수많은 유소년 축구클럽 생활을 통해 제가 평생 써먹을 기본기가 이미 완성되어 있어야 할 나이이고, 지금 이름 높은 세계적인 스타들 대부분이 이미 그 나이 때 스타로의 ‘예약”이 사실상 끝나 있었다는 것을 저 아이는 알고나 있을까?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축구와의 인연은 이처럼 초등학교 시절 동안 억지로 끌어낸 급우들과의 ‘골목축구’로 끝날 확률이 거의 100%라는 사실을 지금 저 아이에게 알려주는 것은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설령 저 녀석이 마라도나 보다 더 탁월한 재능을 타고났다 하더라도 이곳이 캐나다 인 이상 이런 사실은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 이다.

 

그래, 에이드리언은 브라질이나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어야만 했다. 하다못해 한국에서만 태어났더라도  지금 보다는 훨씬 더 많은 가능성이 열렸을 것이다. 소질이 있든 없든, 그 사랑과 열정만으로도 최소한 자신이 갈수 있는 한계까지는 가볼 기회가 주어졌을 테니까…… .  

 

엉뚱한 얘기가 좀 길어졌는데, 여러분은 이미 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짐작했을 것이다. 그렇다. 바로 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서 ‘환경’의 그 막강한 위력을 얘기하고 싶은 것 이다.

 

얼마 전에 어느 책에서 빌 호란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이 사람이 나보다 두 살 아래인데, 모형미술계에 필적할 경쟁자가 없는 최고수로 인정을 받은 것이 삼십 대 초반이고 그런 상황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 기사에서 자기가 열 한 살 때인가, 열 두 살 때 처음 참가한 모형 콘테스트(비록 동네 모형점 주최이지만 )에 아버지의 구두상자로 베이스를 만든 디오라마를 들고 나갔던 얘기를 읽으면서 그 무렵에 나는 뭘 하고 있었던가 잠시 계산해 보았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나는  프라모델 이란걸 전혀 구경해 본적도 없고 디오라마가 뭔지도 몰랐다는 걸 깨닫고 혼자 웃었다.

 

생각해보면 어린시절의 내가 영락없이 바로 그 에이드리언 이었던 것이다. 정말 미치도록 좋은데 정확하게 그게 뭔지도 모르겠고, 가르쳐 줄 사람도, 책도 없고, 무엇보다 재료부터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고…… 당연히 ‘내가 미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지금과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하는데 생각이 미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생각은 1993, 처음 유로밀리테어에 참가했을 때 느꼈던 충격으로 옮겨갔다. 그때는 이미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모형잡지 란걸 스스로 만들어 발행인으로 행세하고 있을 때였고, 어린 시절에 비하면 비약적으로 발전한 환경으로 인해 외국의 유명한 대가들의 작품을 비록 사진으로나마 적지 않게 접할 수 있었던 탓에 “뭐, 이 친구 들이라고 별것 아니잖아” 하는 시 건방이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느꼈던 그 충격과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작아지던 느낌도 다시금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것은 고립된 산골마을에서 독학으로 공부하여 제가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줄 알고 있던 시골 수재가 대처에 나와서 치르게 된 호된 신고식에 다름 아니었고, 이처럼 ‘개안’이 시작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활동무대를 이곳 북미로 옮긴 이후로도 이런  ‘삽질’은 꽤 지속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로 비중도 없는 어느 대회에서 낙선을 하고 돌아오면서 “씨X, 이제 관둬” 해버리기 딱 좋은 그 순간에도 “이 놈들이 중요하다고 생각 하는 게 나하고는 다른 것 같은데, 도대체 그게 뭐냔 말이다…” 라고 씩씩대는 나를 지켜보며 마누라는 “세상에 뭐 이런 남자가 다 있냐?’ 싶었다고 한다. 이 여자 표현을 빌면 “ 돈도 밥도 안 나오는 그 하찮은 일에.. )

 

하여간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깨닫게 된 사실은 그것이 나에게 재능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환경의 차이가 가져다 준 20년이란 출발시차를 좁혀가는 과정이었다는 것과,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본래 ‘우리 것’ 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깨달음 이다.

 

 “모형은 그냥 내가 즐기자고 만드는 것” 이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아마추어 모델러들 에게 있어서 이 말은 좀 거창하게 느껴지거나 쉽게 와 닿지 않는 얘기일 테지만, 내게 있어서 이것은 정말 중요한 명제였고 반드시 극복해야 할 절실한 과제였다.

 

모든 문화는 사람들의 피 속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난 유전형질의 소산 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 그 사회가 만들어낸 환경의 산물이다.  캐나다인 에이드리언이 아이스하키라면 또 모르겠으나 축구선수로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희박한 것은 바로 이 환경의 한계 때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메이저 모형 메이커들이 아시아에 있다고 하나 그것은 국제적 분업이 이루어지는 현대 산업구조의 결과물 일 뿐이지, 그렇다고 해서 축소모형의 전통이 유럽에서 시작되었고 우리에게는 원래 그 비슷한 것 조차도 없었다는 역사가 뒤집어지는 것은 아니며, 이 등식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들이 만들고 발전 시켜온 그들의 문화에 그들이 도출해낸 원칙과 기호가 존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아무리 인터넷이 발전되어 전 세계의 모형 사이트에 순간접속이 가능하고 전 세계에서 발행된 책을 마음대로 구해 읽을 수 있는 요즘이라고 해서 이런 오랜 전통과 정서가 모두 일률적으로, 동시에 공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런 엄연한 사실을 무시하고  “누가 뭐 라든 우리에겐 우리의 방식이 있다” 는 식의 호기를 부리는 것은 자유 이겠으나, 그것은 십중팔구 주류에 진입하지 못한 자들의 서글픈 자위행위로 끝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이 필자가 다른 분야는 잘 모르지만 최소한 음악이든, 미술이든, 우리 아닌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예술’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 본고장으로의 유학 (하다못해 단지 얼마간 현지에서 살아보는 것 만이라도) 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믿게 된 것은 이런 절실한 체험의 결과다.

 

다행스럽게도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은 고무적이다. 앞서 말 한대로 이른바 ‘국제표준’이 실 시간대로 전해지는 정보전달의 발전으로 인해 이른바 본바닥과 변경의 격차가 예전에 비해 엄청나게 좁혀진 것은 비단 우리 모형 미술계 만의 현상이 아니다. 과거 같으면 피겨 스케이팅 같은 것은 당연히 전통의 강호-러시아, 캐나다의 독무대였지 어찌 우리의 김연아 양이 국제무대에서 연거푸 우승을 하는 상황을 꿈이라도 꾸었던가?

 

나는 김연아 선수처럼 원래 우리 것이 아닌 분야에서, 그리고 오랜 기간 그건 우리 몫이 아니라고 체념해 온 소외분야 일수록 거기에서 일구어낸 값진 성공에 가슴이 뛴다. 그것은 평지에서 혼자 돌탑을 쌓기 시작해서 이미 앞서간 선배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쌓아놓은 높은 언덕 위에서 돌탑을 쌓기 시작한 이들보다 더 높은 탑을 우뚝 세워 놓은 것과 똑 같은 성취에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두들 그 성취에 환호하고 있을 때 나는 한편으로 조마조마함을 느낀다.

 

자신이 속해있는 환경의 한계를 극적으로 뛰어넘은 자, 그래서 가까운 주변에는 자신과 대등한 수준의 경쟁자도 없고, 그 성취가 가지는 큰 의미와 지금 그녀가 속해있는 세계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도 없는…. 다시 말해 전체적인 환경이 받쳐주지 않는 상태에서 그 본인 한 사람만이 유별나게 출중한, 그런 ‘개천의 용’이 사실은 얼마나 불안한 존재인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김연아 에 이어 2, 3등을 배출한 나라에는 그와 대등한 수준, 혹은 언제라도 원래 자신들의 위치를 간단하게 탈환할 수 있는 그런 선수들이 즐비하게 대기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김연아 하나가 그 위태로운 정상에서 굴러 떨어지는 순간, 그걸로 끝이다.  

 

“어째, 웬일인가 했어……” 라는 자조를 내 뱉거나, 혹은 또 다시 언제가 될지 모르는 ‘천재’가 우연히 출현해 주기를 기다리거나, 그 조차도 아니라면 그냥 깨끗이 잊혀지고 만다.

 

이 ‘ 군포 수리고 2년생’이 한 두 번 국제대회에서 우승을 했다고 해서 한국이 갑자기 피겨스케이팅 강국이 된 것도 아니며, 우리가 이 작은 소녀 혼자서 힘든 분투를 벌이고 있을 때 보태준 것이 손톱만큼도 없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물론 그것이 한때나마 순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그 자리에 까지 올랐던 그녀의 책임도 아닐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환경이 가지는 한계이고, 그 한계를 뛰어넘은 사람이 위대한 이유다.

 

사람들 대부분이 ‘메르데카 컵’이 세계에서 가장 큰 축구대회인줄 알고 있던 그 시절에 유럽의 프로 팀으로 발탁 되어가서 최상위권의 활약을 보여주었던 차범근 감독이나 골프의 박세리 선수, 유럽인 왕족들과 부호, 명사들의 철옹성과 같았던 국제올림픽 위원회에서 최초의 아시아출신 위원이 되었던 김운용 총재, 박찬호 선수, 김연아 선수 … 내가 이런 사람들을 좋아하고 박수를 보내는 것은 이들이 모두 이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환경의 족쇄를 뛰어넘은 사람들이기 때문이고, 설령 어느 날 그들이 몰락한다 하더라도 나는 영원히 그들의 열렬 팬으로 남을 것 이다.  그 후일담에 관계없이 그들은 스스로 입증했던 기록 그 하나만으로도 이미 영웅이기 때문이다.    

 

하여간…. 그런 의미에서…. 지금부터 계를 모아서라도 올 7월에 개최될 모형 미술계 최고, 최대의 제전, ‘모델월드 엑스포2008 트레엔나레’ 구경 가실 분 안 계십니까?

 

자신 하거니와 사진이나 인터넷으로 보는 것과 현장의 느낌 차이는 그야말로 천지차이 입니다. 이거, 정말 투자할만한 유학입니다.

 

그야말로 자기만족을 위한 모델러라면 이것이 호사 한번 하는 거로 그치겠지만, 전업이든 부업이든, 혹은 순수한 취미이든 간에 기왕 시작한 것, 정말 남들보다 한번 잘 해보겠다는 꿈을 가진 분이라면 필수입니다.

제가 보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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