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만들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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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04 23:5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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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랑

*이 글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글입니다.
이것이 옳다는 주장의 글이 아니라 개인적인 느낌과 감상을
적은 글이라는 것을 미리 말씀 드립니다.
돌이켜보면 내가 미술을 하게 되고 모형을 만드는 사람이 되는 데에는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의 한마디가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 방학숙제로 만들었던, 찰흙을 빚어 만든 파도를 뚫고 솟구쳐 오르는 돌고래를 보신 미술선생님이 '세랑이는 커서 화가나 조각가가 되면 좋겠구나'라는 그 한마디가 내 인생에 첫 번째 전환점을 찍어준 것이다.
고3 여름방학, 또 한번의 전환점이 찾아오게 된다. 연극영화과 입시를 준비하던 내게 미련이 남아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미술'이란 두 글자는 잊고 있었지만 여전히 만화 그리기와 프라모델 만들기는 내게 있어서 가장 즐거운 휴식이자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또 하나의 세계였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서양화 전공의 미대 1학년생인 나는 한 학기 동안 또 석고상을 그려야 했다. 석고상 그리기는 분명 기초 데셍 력을 기르기 위한 과정이었겠지만, 늦깎이 미대입시를 준비하느라 남들의 세배, 네 배의 양으로 지겹게 해댄 석고덩어리 그리기는 정말 재미없었다.
"
깐깐하고 무섭기로 소문났던 그 교수님의 표정이 일순 누그러지며 난 더 이상 혼나지 않아도 되었고 덤으로 그 수업을 마칠 즈음 좋은 성적까지 받게 되었다
.1990년 취미가 창간 이후, 난 십 수년을 한결같이 모형을 만들어왔다. 모형잡지사의 필진으로 시작해서 직원으로, 그리고 편집장을 거치며 건담, 캐릭터 인형, 전차, 비행기, 함선, 밀리터리/ 히스토릭 인형을 모두 섭렵했고 단품, 비넷, 디오라마를 가리지 않고 만들어댔다. 어떤 장르이건 머릿속에 좋은 이미지가 떠오르기만 하면 그것을 만드는 시간은 새로운 도전이자 즐거운 행위였다. 미친 듯이 모형을 만들었고 많을 때는 한 달에 1/48 비행기 한대에 1/16 빅 스케일 전차와 인형까지 해치우곤 해서 이대영 전 편집장님께서는 날보고 모형을 풀빵 찍듯 만들 어 댄다면서 '모형공장'이라고 부를 정도였으니 말이다.
내게 있어서 모형제작은 단순히 그 키트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표현해 보는 일이었고, 그것이 미치도록 즐겁고 재미있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그때'가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괴로웠다.
10년을 넘게 직업으로 모형을 만들고 나니 머릿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면서도 내 손은 마치 정교한 기계와도 같이 탱크에 워싱을 하고 블랜딩을 하고 있었다.
매달 마감을 앞두고 착착 완성 작을 뽑아내고 그걸 사진으로 찍어 기사를 만드는데 익숙해진 내 몸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고, 이미 나는 모형을 만드는 기계가 되어있었다. 진짜 '모형공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엎친대 덮친 격으로 만성 목 디스크로 인한 왼팔 마비증세까지 와버렸다. 팔에 힘이 빠지고 바늘로 쑤시는 듯한 통증에 왼손으로 모형을 들고 있을 수 조차 없어서 탱크를 책상에 내려놓은 채 엎드리다시피 하고 오른손만으로 만들고 색칠을 해야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잡지 마감시간은 칼 같이 다가오고 있었다.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으며 한달 한 달을 버텨가던 중 바로 그 날이 찾아왔다.
그 후로 지난 2년간 난 모형에 손도 대지 않았다. 모형이 싫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 습관처럼 모형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십 수년을 지속한 습관은 무서운 것이어서 종종 미치도록 모형을 만들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차라리 나는 모형이 아닌 옷을 만들어 입거나 그림을 그렸고, 더불어 바이크를 만들어 타고 여행을 다녔다. 의도적으로 모형을 멀리했고, 대신에 미술전시나 영화, 책을 보는 일이 많아졌으며 그저 혼자 바이크를 타고 이름 모를 시골길을 달렸다. 모르는 사람들은 팔자 좋게 유람을 다닌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십 수년 동안 나를 지배해오던 것들과 싸우는 일 이었고, 그것들을 털어버리는데 온 힘을 다해야만 했다. 마감이 지나면 모형잡지라는 이름으로 팔리게 될 '138페이지의 백지'에 무언가를 채워 넣으려는 생각으로 꽉 차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내 머리 속에 조금씩 새로운 생각들과 경험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며 겨우겨우 나는 다시 모형 공구상자를 열 수 있었다.
모형을 잘 만들기는 쉽다. 물론 모형을 잘 만들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경험, 그리고 각종 테크닉을 섭렵하고 그것을 온전한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노력'을 하기만 하면 되는 문제다. 잘 만든다는 것은 '감성'보다는 '기능'의 문제이며 기능은 타고나기도 하지만 대부 분 시간과 노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법이다. 그래서 잘 만들기는 쉽지만 '좋은 작품'을 만들기는 어렵다.
나는 잘 만든 작품보다는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고 싶다. 신기하고 정교하며 놀라운 작품보다는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고 싶다. 그래서 내 작품을 보며 사람들이 '어떤 재료로 만들었나요? 도료는 어떤 것에 무슨 색을 쓴 건가요?' 라고 묻기보다는 '어떻게 이렇게 슬픈 인형을 만드셨나요?', '보고 있으면 마음이 따듯해지는 기분이에요.'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거창하게 스스로 '예술'이라는 타이틀을 걸지 않아도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이 내 감성과 이미지를 공유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좋은 작품, 진정한 예술이 될 것이다.
모형제작이란 것을 직업으로 삼은 지 올해로 18년째, 난 또다시 새로운 전환점을 찍고 있다.
당돌하고 거칠었으며 미숙했지만, 순수하고 열정적이었으며 좋은 작품을 그려내고 싶다고 생각했던 20살 어느 여름날 그때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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