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만들고 싶지 않다
게시판 > 알수 없음
2008-02-04 23:57:28, 읽음: 2953
김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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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글입니다.
이것이 옳다는 주장의 글이 아니라 개인적인 느낌과 감상을

적은 글이라는 것을 미리 말씀 드립니다
.

돌이켜보면 내가 미술을 하게 되고 모형을 만드는 사람이 되는 데에는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의 한마디가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 방학숙제로 만들었던, 찰흙을 빚어 만든 파도를 뚫고 솟구쳐 오르는 돌고래를 보신 미술선생님이 '세랑이는 커서 화가나 조각가가 되면 좋겠구나'라는 그 한마디가 내 인생에 첫 번째 전환점을 찍어준 것이다
.


이전까지도 무언가를 끄덕이거나 만드는 것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것은 누구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라거나 잘 만들고자 하는 노력 따윈 전혀 들어있지 않은 것이었다. 그저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표현하고자 하는 일차원적인 욕구에 의해 만든 것이었고 내가 남들보다 그림을 잘 그리는지 못 그리는지에 대한 개념 조차도 없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진흙장난과 낙서하기를 좋아했던 나에게 '미술'이란 두 글자를 각인시켜준 그날의 기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중고등학교를 거치며 나의 목표이자 꿈은 연극과 영화를 향하고 있었다. 연기와 영상은 떠오르는 이미지에 가득 차 있던 한 소년의 미래에 대한 뚜렷한 희망이자 오롯한 외길처럼 보였다
.

3 여름방학, 또 한번의 전환점이 찾아오게 된다. 연극영화과 입시를 준비하던 내게 미련이 남아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미술'이란 두 글자는 잊고 있었지만 여전히 만화 그리기와 프라모델 만들기는 내게 있어서 가장 즐거운 휴식이자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또 하나의 세계였다
.


미술선생님의 권유로 나간 사생대회에서 입상 하게 된 것을 계기로 견학을 가게 된 한 미술대학의 서양화 실기 실에 들어서는 순간, 난 새로운 전환점에 발을 들여 놓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 결코 밝지 않은, 어찌 보면 다소 음침하게 느껴지는 실내에는 담배연기가 자욱했고 세로로 길게 난 창을 통해 빛이 새어 들고 있었다. 코를 톡 쏘는 테레핀 유의 송진 향과 키를 훌쩍 넘겨 벽면을 가득 채운 약 200호 정도의 그림이 앞에 서 있었다. 그날의 분위기는 완벽하게 기억하지만 그 그림이 무엇이었는지는 불분명한데, 그게 어찌되었던가에 입시를 불과 두 달 반 정도 남긴 내 현실을 잊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인상을 남긴 경험이었고 그 날 이후 난 미대 입시를 준비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서양화 전공의 미대 1학년생인 나는 한 학기 동안 또 석고상을 그려야 했다. 석고상 그리기는 분명 기초 데셍 력을 기르기 위한 과정이었겠지만, 늦깎이 미대입시를 준비하느라 남들의 세배, 네 배의 양으로 지겹게 해댄 석고덩어리 그리기는 정말 재미없었다
.


너무나 지겨웠고 고지식한 교수진의 방식에 대한 맹랑한 내 반항심은 석고상에 보이는 모든 명암을 반대로 바꿔 그리기로 나타났다. 어두운 곳은 밝게 그리고 밝은 곳은 어둡게 처리하는, 마치 사진의 네거티브 필름에 찍힌 것처럼 말이다. 교수님께 불려가 혼 줄이 났지만 난 나대로 내 주장도 함께 말씀을 드렸다
.


"

잘 그리기는 쉽습니다. 잠자코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것은 더욱 쉽습니다. 전 쉽게 잘 그리는 것 말고 좋은 작품을 그려내고 싶어서 미술대학에 왔습니다."

 

깐깐하고 무섭기로 소문났던 그 교수님의 표정이 일순 누그러지며 난 더 이상 혼나지 않아도 되었고 덤으로 그 수업을 마칠 즈음 좋은 성적까지 받게 되었다

.

1990
년 취미가 창간 이후, 난 십 수년을 한결같이 모형을 만들어왔다. 모형잡지사의 필진으로 시작해서 직원으로, 그리고 편집장을 거치며 건담, 캐릭터 인형, 전차, 비행기, 함선, 밀리터리/ 히스
토릭 인형을 모두 섭렵했고 단품, 비넷, 디오라마를 가리지 않고 만들어댔다. 어떤 장르이건 머릿속에 좋은 이미지가 떠오르기만 하면 그것을 만드는 시간은 새로운 도전이자 즐거운 행위였다. 미친 듯이 모형을 만들었고 많을 때는 한 달에 1/48 비행기 한대에 1/16 빅 스케일 전차와 인형까지 해치우곤 해서 이대영 전 편집장님께서는 날보고 모형을 풀빵 찍듯 만들 어 댄다면서 '모형공장'이라고 부를 정도였으니 말이다.


내게 있어서 모형제작은 단순히 그 키트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표현해 보는 일이었고, 그것이 미치도록 즐겁고 재미있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그때'가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괴로웠다
.


모형을 만드는 시간이, 모형잡지를 만드는 시간이 지옥과도 같았다. 몸도 마음도 모두 지쳐 다 내팽개치고 어딘가로 숨어들고 싶을 때 조차도 내 손은 쉬지 않고 에폭시 퍼티 반죽을 주무르고 있거나 사포 질을, 또는 붓을 잡고 인형의 얼굴을 색칠하고 있었다
.
10
년을 넘게 직업으로 모형을 만들고 나니 머릿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면서도 내 손은 마치 정교한 기계와도 같이 탱크에 워싱을 하고 블랜딩을 하고 있었다
.


내가 만들고 싶은 모형이나 이미지를 만들기 보다는 독자들이 보고 싶어하는, 또는 독자들이 좋아하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내 몸과 생각을 지배하고 있었고 오로지 완성만을 위한 한없이 지루한 과정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
매달 마감을 앞두고 착착 완성 작을 뽑아내고 그걸 사진으로 찍어 기사를 만드는데 익숙해진 내 몸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고, 이미 나는 모형을 만드는 기계가 되어있었다. 진짜 '모형공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

엎친대 덮친 격으로 만성 목 디스크로 인한 왼팔 마비증세까지 와버렸다. 팔에 힘이 빠지고 바늘로 쑤시는 듯한 통증에 왼손으로 모형을 들고 있을 수 조차 없어서 탱크를 책상에 내려놓은 채 엎드리다시피 하고 오른손만으로 만들고 색칠을 해야 했다
.
그러는 와중에도 잡지 마감시간은 칼 같이 다가오고 있었다.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으며 한달 한 달을 버텨가던 중 바로 그 날이 찾아왔다
.


내가 더 이상 나만의 생각과 이미지를 담은 '작품'이 아닌 '완성 작'을 뽑아내는 기계가 되어가고 있음을 통렬히 알아차린 그 날 이후로 난 더 이상 이 일을 계속해나갈 힘을 잃고 말았다. 물론 경제적인 문제라던가 건강 문제 같은 표면적이고 현실적인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잘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

그 후로 지난 2년간 난 모형에 손도 대지 않았다. 모형이 싫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 습관처럼 모형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십 수년을 지속한 습관은 무서운 것이어서 종종 미치도록 모형을 만들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차라리 나는 모형이 아닌 옷을 만들어 입거나 그림을 그렸고, 더불어 바이크를 만들어 타고 여행을 다녔다
. 의도적으로 모형을 멀리했고, 대신에 미술전시나 영화, 책을 보는 일이 많아졌으며 그저 혼자 바이크를 타고 이름 모를 시골길을 달렸다. 모르는 사람들은 팔자 좋게 유람을 다닌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십 수년 동안 나를 지배해오던 것들과 싸우는 일 이었고, 그것들을 털어버리는데 온 힘을 다해야만 했다. 마감이 지나면 모형잡지라는 이름으로 팔리게 될 '138페이지의 백지'에 무언가를 채워 넣으려는 생각으로 꽉 차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내 머리 속에 조금씩 새로운 생각들과 경험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며 겨우겨우 나는 다시 모형 공구상자를 열 수 있었다.

모형을 잘 만들기는 쉽다
. 물론 모형을 잘 만들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경험, 그리고 각종 테크닉을 섭렵하고 그것을 온전한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노력'을 하기만 하면 되는 문제다. 잘 만든다는 것은 '감성'보다는 '기능'의 문제이며 기능은 타고나기도 하지만 대부 분 시간과 노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법이다. 그래서 잘 만들기는 쉽지만 '좋은 작품'을 만들기는 어렵다.

나는 잘 만든 작품보다는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고 싶다. 신기하고 정교하며 놀라운 작품보다는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고 싶다. 그래서 내 작품을 보며 사람들이 '어떤 재료로 만들었나요? 도료는 어떤 것에 무슨 색을 쓴 건가요?' 라고 묻기보다는 '어떻게 이렇게 슬픈 인형을 만드셨나요?', '보고 있으면 마음이 따듯해지는 기분이에요.'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


그것이 반드시 모형으로 불려지지 않아도 좋고 스케일이 맞지 않아도 좋으며 꼭 잘 만들고 잘 색칠되어 보이지 않더라도, 그저 내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와 가슴속의 감성을 온전히 담아내는 그릇이면 좋겠다
.
거창하게 스스로 '예술'이라는 타이틀을 걸지 않아도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이 내 감성과 이미지를 공유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좋은 작품, 진정한 예술이 될 것이다
.

모형제작이란 것을 직업으로 삼은 지 올해로 18년째, 난 또다시 새로운 전환점을 찍고 있다
.


당돌하고 거칠었으며 미숙했지만, 순수하고 열정적이었으며 좋은 작품을 그려내고 싶다고 생각했던 20살 어느 여름날 그때처럼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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