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난 체의 면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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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09 22:02:23, 읽음: 2782
dougl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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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난 체 한다……아무리 좋게 해석하려 해도 듣기에 좀 거북한 말이다. 부정적인 의미가 너무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말을 좀 바꿔보자.

 

자신감, 자기존재의 확인, 혹은 전문성에서 비롯된 권위…… 이렇게 해놓고 보니 한결 더 그럴듯하게 들리는데, 생각해보면 이게 다 같은 말 아닌가? 그런데 왜 이‘잘난 체’가 항상 말썽일까? 심지어 좁은 우리 모델러 들의 세계 안에서 조차 말이다.

 

MMZ 안에서 가끔 벌어지는 대부분의 논쟁이 급기야는 “도대체 너, 얼마나 잘 만들기에 그러느냐? 어디 네가 만든 거 한번 보면서 얘기하자”는 식으로 귀결되기 일쑤이고, 어느 방송에서 우리가 즐기는 모형을 두고 장난감이라고 했다고 바글바글 흥분하는 것이나 많은 사람들이 모형을 만드는 이유로  “나 스스로 즐겁기 위해서”라는 첫 번째 이유 다음으로 “내 작품을 인정해주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자랑하며 교감을 나누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들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 내 존재를 인정 받고 싶다는 일종의 ‘잘난 체’ 아닌가?

 

이런 의미에서 잘난 체 그 자체는 전혀 비난 받을 이유가 없다. 이 모두가 그야말로 자기존재의 확인이고, 이런 재미조차 없어서야 이 재미없는 세상을 무슨 맛으로 살겠는가?

 

다만 문제는 도대체 어디까지가 ‘자기세계에 대한 설명’이고 어디부터가‘주제넘은 잘난 체’인가 하는 것을 객관적으로 수치화 할 수 없을 뿐 더러, 그 기준이 하는 사람과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내가 어느 지방 콘테스트 참가자의 요청에 의해 “디오라마 란 이래야 한다”라고 말 한다면 ‘유명작가의 귀중한 한 말씀’이 되겠지만 같은 말을 세퍼드 페인 선생에게 한다면 그날로 미친놈이 되어버릴 것이란 얘기다. 특히나 이런 문제는 인간관계와 그 관계에 걸 맞는 적절한 몸 높이의 수위조절이 중요한 한국사회에서는 더욱 더 예민할 수밖에 없는데, 실제로 우리 모델러들의 좁은 세계 안에서 가끔 벌어지는 작은 갈등들은 거의 100%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간단하다. 누구라도 동의할 수 있는 일정한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 바로 그 잘난 체 할 수 있는 면허를 주어버린다면 간단한 거 아닌가?

 

비록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사람 사는 세상인 만큼 서구, 미주에서도 이것은 예민한 문제이고, 이런 애매한 문제를 명쾌한 제도를 통해 해결하기 좋아하는 이곳 사람들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그래서 그런 게 있다. 그 많은 예술, 미술계의 칭호 헌정이 바로 그것이다.

 

손 꼽히는 오케스트라 지휘자나 작곡가 에게 주어지는 ‘ 메트로’, 뛰어난 무용가에게 주어지는 ‘캄머 텐 처린’, 뛰어난 조각가에게 주어지는 ‘마이스터(혹은 마스터, 마에스트로)’등의 칭호가 바로 그런 면허증이다.

 

말하자면 “너는 최소한 너와 동급의 수준에 있는 대가가 아닌 이상, 아무도 감히 잘하네, 못 하네 따지지 못 할 만큼 앞서있는 사람이다”라는 사실을 사회적으로 인정해 준다는 뜻이고, 실제로 이런 약속은 잘 지켜지는 편이다.

 

사실 천부의 재능이나 각고의 노력으로 남다른 경지에 도달한 대가들이 언제까지나 일반인, 혹은 저 아래 수준에 머물러 있는 동업자들과 끝없이 비교되면서 비평 같지도 않은 비평에 시달려야 하는 것도 무척 피곤한 일임에 틀림없을 것이므로…… 그리고 그 저변의 크기로는 이처럼 잘 알려진 다른 예술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말 많고 '잘난 사람' 많기로는 전혀 그에 못지않은 모형 미술계에도 당연히 그런 게 있다.

 

전미 미니추어 협회(MFCA)나 모델 엑스포에서 주어지는 ‘그랜드 마스터’, 혹은 ‘월드 마스터’ 칭호가 바로 그런 것 이고, 그 밖에도 전 세계의 권위 있는 모형대회는 저마다 그 비슷한 영예칭호 제도를 만들어 놓고 있다. 이를테면 시카고 쇼의 ‘시카고 메달’도 그런 것이고, 이름은 잊었지만 캘리포니아의 시캠스 대회에도 그와 비슷한 것이 마련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단순히 모형을 잘 만든다고 해서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고, 이게 바로 내가 하고자 하는 얘기의 본론 이기도 하다. 그 해 대회에서 가장 잘 만든 사람에게는 ‘베스트 오브 쇼’ 가 주어지므로 이런 영예메달, 혹은 칭호는 당연히 그것과는 다른 것 이고,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상 아닌 상을 베스트 오브 쇼 보다 더 높은 명예로 간주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럼 무엇이 이런 명예헌정의 기준인가?

 

첫 번째로는 물론 베스트 오브 쇼를 몇 번 거듭 수상할 만큼 잘 만드는 솜씨다. 그런데 대부분의 주최측, 혹은 재단에서 그보다 더 필수적인 덕목으로 꼽고 있는 것이 바로 Contribution, 즉 “기여도”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자기 혼자 잘 만들어 큰상 타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나 좋은 일이지, 다른 사람들에게 ‘보태준 것’이 없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존경을 바쳐야 할 이유도 없다는 얘기다.

 

그럼 무엇이 Contribution인가?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첫째로는 오랜 경력인데, 이걸 입증할 방법은 사실상 여러 차례의 동일대회 참가와 매번 거기서 상위권의 입상을 기록하는 수 밖에 없다.

 

그 다음엔 자원봉사 경력이다. 개인적으로생기는 것’ 하나 없는 모형관계의 조직이나 행사에 봉사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취미생활에 도움을 주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형예술 자체의 진보와 발전”에 기여한바 있는가 하는 것인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모형관계 전문지에 활발히 기고를 하거나 저서를 발행한 경력이 특히 중요시 된다.

 

물론 지금 여러 단체에서 이미 이런 명예칭호를 받은 사람들이 이런 조건을 모두 충족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그 공통된 메시지는 분명하다. 간단히 말해서 “저 혼자 잘 만드는 걸로는 안되고, 다른 친구들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어야만 존경 받을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 이다. 따라서 흔히 한국식으로 “나서지 않아서 그렇지, 속 실력은 내가 최고”라는 와룡선생의 자부심은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잘난 체’ 할 수 있는 면허가 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에 반해 이런 명예칭호를 받은 사람에게는 확실하게 ‘잘난 체’해도 되는 면허가 부여된다 - 이건 내 자신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물론 이곳 사람들 중에도 세련된 ‘몸 높이 조절’이 서툴러서 그 해의 베스트 오브 쇼를 한번 수상하고 기고만장한 나머지 나를 향해 “네가 이제야 인형색칠이 뭔지를 깨달은 것 같구나” 하는 식의 오버를 하는 좀 웃기는 친구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마스터 들과 논쟁을 하려 들거나 한번 ‘씹어’보겠다고 시도하는 사람은 없다. 말하자면 최소한 모형 분야에서만큼은 그의 말이 진지하게 경청되고 존중될 수 있다는, 말하자면 좀‘잘난 체’해도 되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쯤에서 당연히 생각나는 게 하나 있다. 바로 서구 사회를 떠 받치는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전통이다.  평소에는 그 사회에서 가장 특권을 누리던 지도층 일수록 일단 국가나 사회의 위기상황이 닥치면 가장 먼저 희생을 바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정신이 이 모형 계에도 어김없이 적용된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평소에 네가 좀 잘난 체 해도 시비를 걸지 않겠다. 기분 좋으면 꽤 존경도 해 줄 수 있다. 그대신 너는 내 취미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을 줘야 한다”

 

어째, 합리적이지 않은가?

 

 면허도 받은 적 없으면서 잘난 체 하는 사람 많고, 그거 보면서 아니꼬워 하는 사람은 더 많고. 그래서 자잘한 감정갈등이 많은 우리의 문제는 그런 묵시적인 면허의 전통도 없고, 높이 올라갈수록 책임은 없고 일방적인 존경만 기대하는 우리의 오랜 관습과 관계가 있다는 생각은 안 드시는지?

 

모형 좀 만들거나 아는 것 많다고 잘난 체들 하지 마시라. 그리고 정말 잘난 체 하고 싶으면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 하시라.

 

마지막으로 이런걸 모두 실천하는 사람이 있으면 설령 좀 잘난 체 하더라도 그걸 두고 눈꼴시어 하거나 태클 걸지 마시라. 바로 그런 게  ‘싸가지’ 없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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